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스부르크 제국 (문단 편집) == 명칭 == 1526년,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훗날 형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 [[페르디난트 1세]]가 그의 아내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안나]](Anna von Böhmen und Ungarn 또는 Anna Jagiellonka)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보유한 헝가리 왕국 서북부, 크로아티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을 물려받아 많은 영토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면서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가 공국에서 대공국이 되었을 시기의 인구는 2,000,000명 정도였지만 [[헝가리 왕국]]의 서북부와 크로아티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당시에는 [[슐레지엔]]도 보헤미아 왕국령이었다.]을 승계받은 결과, 인구가 수천만 명에 달하는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후 1556년,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퇴위할 때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스페인령 네덜란드|저지대 국가]], [[스페인 제국|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물려주고 [[페르디난트 1세]]를 차기 황제로 지명하면서[* 페르디난트 1세는 1521년, 이미 오스트리아를 넘겨받았고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는 1526년 처남의 전사로 상속녀가 된 아내를 통해 상속받았다. 이 국가들은 카를 5세와는 관련이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계열과 스페인 계열로 분리되었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통칭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의 각 영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상속된 일종의 [[동군연합]] 상태로,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될 때까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공식적인 국명은 아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개별 국가들은 지역의 독자적인 전통을 상당 부분 유지하며 비교적 폭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이들 합스부르크 세습령들은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로 작용했고 [[인구]]는 수천만 명이나 되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명칭은 당대부터 편의상 널리 쓰였다. [[수도(행정구역)|수도]]는 현재와 같이 [[빈(오스트리아)|빈]]이었는데 [[오스트리아 공국]]이 대공국으로 승격되었을 때는 인구가 이미 수만 명이었던 주요 도시였고 1683년에는 인구 110,000명, 1804년에는 인구 230,000명으로 급격하게 성장해 당시까지도 여전히 인구 수만 명에 머물렀던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 독보적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다른 왕국들에 비해 느슨한 동군 연합 체제였던 주된 원인은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보헤미아, 헝가리 등을 압도할 국력과 규모가 아닌 것도 있었으나,[*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은 주로 [[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케른텐 공국]], [[잘츠부르크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티롤 후백국]], [[포어아를베르크 주|포어아를베르크 백국]] 등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 영토에 주로 거주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전체 인구의 약 24%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1867년, [[대타협]] 당시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4,500,000명에 불과해서 수천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의 일부만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헝가리인]]이 차지했던 인구인 약 20%를 합쳐도 절반에 미달했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영향력이 집중되기 어려웠고 군사적으로도 각 지역에서 징집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사이의 대화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산업적으로 [[스코다]]로 대표되는 보헤미아 왕국은 [[동유럽]] 최대의 중공업 지대였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영역 내에서도 [[자동차]]로 대표되는 [[기업]]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산업적으로도 꽤나 발전한 국가였다.] 기본적으로 무력을 통한 합병이 아닌 결혼을 통한 상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1918년 제국 해체 전까지 선출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현지 귀족들의 권한과 관습을 존중하면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페르디난트 1세]]와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위를, [[레오폴트 1세]]는 헝가리 왕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왕위 후보자가 나올 수 있도록 법을 바꾸어 사실상의 세습제로 만들었으며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굴복한 보헤미아나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 [[1848년 헝가리 혁명]] 등을 일으켰다 굴복한 헝가리의 권한을 억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1804년 ~ 1867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년 ~ 1918년)도 합스부르크 제국에 포함된 것으로 보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용어는 1526년부터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지칭할 때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다. 애초에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이 이 시기 합스부르크의 영토 전체를 아우르는 정식 국명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국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정식 국명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적지 않게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했기 때문에 직접 지배하는 영토가 제국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처럼 겹치는 영토도 있었으나 서로 별개의 국가였다.[* 특히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직할령의 괴리가 점점 커져서, 17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강역 변화를 요약하면 '서쪽에서 영토를 잃고 동쪽으로 확장'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30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뒤 헝가리 중동부 탈환, [[슐레지엔]]을 잃고 [[폴란드 분할]]로 [[갈리치아]] 지역 획득,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잃고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 등. 문제는 잃어버린 서쪽은 확실한 서유럽(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둘 다) 문화권이었고 독일계나 근친 종족(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게르만계로 주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었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민족]], [[종교]]가 다양해지면서 [[민족주의]]가 도래한 이후에는 제국의 폭탄이 되어버렸다.] 1526년부터 1804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의 직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의 [[국왕]] 또는 [[대공(작위)|대공]]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따로 보유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라고도 부른다. 그래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동일인이었고, 합스부르크의 영토 산하에 여러 왕국과 공국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제국이라는 의미에도 부합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명칭도 틀린 것은 아니다.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고 있었지만 그 전부터 대국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대영제국]]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